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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시간여행-영월, 그 애달픈 시간으로의 유배
작성일 2021-03-01 문의유형
영월에서 비운의 왕 단종을 추억했다. 졸지에 유배객이 되어 만난 청령포에서 장릉까지, 그의 외로움과 아픔이 뼈에 사무치는 듯했다. 하지만 단종을 자유로이 떠나 보내고 만나는 영월은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동강과 서강의 물줄기를 따라 걷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자연은 있을 수 없다.▶청령포에서 장릉까지, 단종을 추억하다 서강에 비치는 햇살은 눈부셨지만 바람은 찼다. 시리도록 맑은 강물 위에는 조각난 얼음덩이들이 유유히 흐른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고 자연이 소리치는 듯했다. 배를 타는 곳에서 청령포까지, 불과 100m도 되지 않는 거리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강 건너로 또렷이 보이는 소나무 숲이 유난히도 짙다. 그 깊은 속내를 헤아리자니 너무나 쓸쓸하고 처연하여 결국 눈을 감게 된다. 560여 년 전, 졸지에 귀양길에 올라 이곳 나루터에서 유배지인 강 건너 청령포를 마주했을 어린 임금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끝도 없는 막막함과 두려움. 사뭇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배에 오른다. 강을 건너는 데 기껏해야 5분 정도지만 무수한 생각이 스치는 시간이다. 배에서 내려 청령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다. 청령포는 조선의 6대 왕인 단종의 유배지다. 지금으로부터 564년 전인 1457년 6월28일. 단종은 한양에서부터 영월까지, 700리 길을 쫓겨 내려와 바로 이곳 청령포에 유배됐다. 할아버지인 세종과 아버지 문종을 여의고,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피비린내 나는 궁중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던 그. 길지 않은 그의 삶이 참담하리만큼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절망의 땅이다. ‘편안하게 고개를 넘는다’는 고장 영월이지만, 실제로는 산 넘고 물 건너야 마침내 닿을 수 있는 오지였고 청령포는 그곳에서도 외진, 육지 속의 섬이었다. 첩첩산중 여섯 봉우리가 둘러싸고 도도히 흐르는 서강이 삼면을 휘돌아 옥죄는 천혜의 감옥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그 자리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내주고 허울뿐인 상왕으로 머물던 단종이 그마저도 2년 만에 강봉되어 노산군이라는 신분으로 마주한 땅 청령포. 참담한 심경으로 나룻배에 몸을 실어 넘실대는 강물을 헤쳐 건넜을 통곡의 땅이다. 5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청령포는 아직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배에서 내리면 모래와 자갈밭이 이어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오래된 소나무 숲 사이로 단종이 머물던 어소가 살포시 드러난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단종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다시 지은 건물로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다. 어소에는 글을 읽는 단종과 그를 알현하는 선비, 살림을 챙기는 궁녀들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유배 생활의 단면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청령포 곳곳에는 단종과 그의 유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청령포 수림지에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이 있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배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관’(觀), 때때로 구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音)이라 이름을 붙인 소나무다. 단종의 아픈 역사를 품고 두 갈래로 높게 자란 소나무는 눈물겹게도 청령포의 수많은 소나무 가운데서도 유독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다.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는 작은 돌탑이 하나 있다. 단종이 한양 땅과 그곳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이다.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으로 작고 소박하지만 돌맹이 하나하나에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있는 듯하다. 청령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노산대는 노산군으로 강봉 후 유배된 단종이 해질 무렵이면 올라 시름에 잠겼던 곳이다. 뒤는 서강이 흐르는 절벽, 멀리 서쪽은 궁궐이 있는 한양으로 매일매일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쳤는지 짐작하게 한다. 어소 담장 건너 정면에 세워진 금표비는 척박한 땅에 버려졌던 어린 임금의 처지를 증언하듯 차갑고도 쓸쓸한 모습이지만 유배지 출입을 금했던 비석이 아니라 복권이 이루어진 영조 2년(1726)에 단종의 유적지를 보호하려 만든 금표다. 비석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출입을 금지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단종어소가 있었던 청령포에 백성들이 출입해 벌채를 하거나 농사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단종 복권 이후 그와 관련된 현장이 어떻게 관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유물이다. 청령포에서의 유배 생활이 두 달 정도 지날 무렵 단종은 영월 객사의 동헌 관풍헌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 해 여름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 청령포가 물에 잠긴 까닭이다. 외딴 유배지를 잠시 벗어나 영월 관아 관풍헌에 머물게 된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관풍헌 앞에는 영월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누각 자규루가 있었다. 단종은 수시로 그곳에 올라 영월 읍내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먼발치에서라도 가엾은 왕을 보러 온 백성들을 보며 따뜻한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슬펐을지도 모를 일이다. 관풍헌에 머무는 동안 단종은 자규루에 올라 자신을 자규(소쩍새)에 빗댄 시 두 편을 지어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규시’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一自怨禽 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孤身隻影 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暇眠夜夜 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窮恨年年 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聲斷曉岑 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血流春谷 落花紅)/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天聾尙未 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何乃愁人 耳獨聰).”피를 토하며 구슬피 운다는 소쩍새에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시가 가슴을 울린다. 유배지 청령포가 아닌 관풍헌에서의 생활도 지독히 외롭고 고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두 달의 시간은 더욱 참담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사육신에 의한 복위 시도로 빚어진 영월로의 유배가 비극의 서막이었다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도모한 또 한 번의 단종 복위 시도는 서인으로의 신분 박탈과 사약이라는 참담한 결말로 이어진다.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 지 두 달. 단종은 결국 죽음을 강요당한 채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승하한다. 1457년 10월24일의 일이다.비극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고, 예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지만 『숙종실록』에서는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단종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하급 관원이 활 끈으로 목을 졸라 세상을 떠나 보냈고 시신은 강에 버려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왕이 서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마저 버려져 방치되는 참담한 비극, 어찌 하늘이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서슬 퍼런 권력의 힘은 어린 왕의 죽음에 대해 숨죽여 우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시던 군주와 함께 하는 것뿐. 단종이 승하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동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꽃잎처럼 산화한다. 이들이 투신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그곳을 낙화암이라 불렀다. 관풍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강 변 흰 석회바위 절벽이 그곳이다. 동강 옆에 있는 금강공원에는 ‘낙화암’이란 비문을 새긴 작은 비석과 낙화암에서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와 시종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민충사가 당시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동강에 방치돼 있던 단종의 시신은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영월 북쪽 동을지에 암장하고 일가족 모두 자취를 감춰버린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감히 장사를 지낼 엄두를 못 낸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가 사라지자 봉분도 없이 평지에 만든 묘를 더 이상 아는 사람은 없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노산군의 암장지를 발견한 건 중종 11년(1516), 영월군수 박충원에 의해서다. 그로부터 25년 후 박충원은 묘의 봉분을 만들어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고, 선조 13년(1580)에 상석, 표석, 망주석을 세워 능역을 조성했으며, 숙종 24년(1698)에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어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지난 2009년, 조선의 다른 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월 장릉은 여느 왕릉들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조선 건국 이후 만들어진 왕릉 중 한양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왕릉이다. 왕릉은 도성이 있는 한양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지침과 관례를 벗어난 유일한 왕릉이며, 능역(왕의 무덤이 위치한 구역)의 배치에 있어서도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을 일직선으로 배치하는 여느 왕릉들과 달리 ‘ㄱ’자 형태로 만들어진 왕릉이다. 왕이 아닌 사람들의 비석과 위패를 모신 유일한 왕릉이기도 하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정려각과 노산묘를 찾았던 박충원을 기념하는 낙촌비, 그리고 종친과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이 그곳에 조성돼 있다. 박충원 낙촌비 옆을 지나 산등성이를 한참 걷다 만나게 되는 단종의 능은 왕의 능인가 싶을 만큼 작고 단출하다. 다만 능의 오른편 지대가 드넓게 탁 트여 평생을 갇혀 산 왕을 위로하는 듯하다. 아래로는 정자각과 단종비각, 수라간, 영천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장릉 안에는 단종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단종의 탄생과 유배, 죽음과 복권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서와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매년 4월이면 비운의 왕 단종을 추모하는 문화제가 영월에서 열린다. 올해로 55회째를 맞이하지만 그를 제대로 떠나 보내는 국장은 550년이 지난 2007년에야 치러졌다.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살아생전 줄곧 갇혀 지냈던 왕은 지금 평안할까. 가장 높은 산자락에서 저 아래 세상을 굽어보며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지는 않을까.▶서강 따라 떠나는 영월 자연여행영월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앞서는 건 으레 단종이다. 우스갯소리로 ‘기승전 단종’이라고도 한다. 그렇듯 역사가 자연을 압도하는 고장이지만 높은 산과 깊은 강이 빚어낸 영월의 자연은 어느 곳 하나 빼놓으면 섭섭할 만큼 수려하다. 태화산, 백덕산, 응봉산, 망경대산 등 험준한 산과 유유히 흐르는 동강과 서강이 남한강이란 이름으로 만나는 곳. 영월은 민낯이 훨씬 정겹고 아름다운 곳이다.영월의 서쪽을 흐르는 강이 서강이다. 평창군 오대산에서 발원한 평창강과 횡성군 태기산에서 시작된 주천강이 영월군 한반도면에서 만나 반대편에서 흘러내려오는 동강을 만나러 가는 강이다. 동강에 비해 부드럽고 순한 서강은 곳곳에 옥토를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만큼 이야기도 많다. 지난 2000년 산책을 하던 마을 주민이 우연히 발견한 ‘한반도 지형’(한반도면 한반도로 555)은 이름처럼 한반도를 쏙 빼 닮았다.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쳐지기 전 강물이 크게 휘돌아 치면서 만들어진 선암마을의 이 특이한 지형은 삼면이 바다이고,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의 지세를 갖춘 한반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국내에 한반도 지형을 닮은 곳이 여럿 있지만 이곳처럼 또렷하고 생생한 현장은 없다. 2011년 대한민국 명승 제75호로 지정되었고, 이곳을 포함한 일대의 하천은 ‘한반도습지’라는 이름으로 지난 2015년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영월을 찾는 여행자들이 처음엔 ‘그걸 뭘!’하며 마다하곤 하지만 결국에는 찾아가 감탄해마지 않는 영월 최고의 여행지이자 포토 존이라는 것이다. ‘한반도 지형’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0.8km의 산길을 걸어가야 한다. 가는 도중 태극기 모양의 바람개비 무리가 쉼 없이 도는 풍경도 보이고, 무궁화꽃을 자세히 소개하는 안내판을 만나기도 하는 등 ‘애국심’을 자극하는 냄새가 살짝 나기도 하지만 유치하다거나 ‘국뽕’ 아니냐고 폄훼할 마음이 생기진 않는다. 오히려 한반도 지형이 가까워질수록 경건해지고 엄숙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침내 한반도를 쏙 빼 닮은 땅 덩어리를 보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왼쪽 가슴으로 손이 올라갈 뻔 했다. 애국가를 부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부모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도 가끔 목격할 수 있다. 여기저기 흔한 게 한반도 지형이라는 선입견으로 마다하지 말고 꼭 찾아가볼 것을 권한다. 특히 가족여행이나 아이들을 동반한 여행이라면 필수 방문 코스다. 적멸보궁 법당 안에는 불상이 없다, 적멸보궁 청령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나기재 정상 부근에는 선돌(영월읍 방절리 산122)이 있다. 약 70m 높이의 바위가 탑 모양으로 솟아올라 두 개의 거대한 절벽이 마주하는 형상이다. 칼로 내리쳐 쪼개진 듯한 두 바위가 만든 절벽 사이로 보이는 마을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특히 물안개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이어지는 서강의 푸른 물줄기를 따라 가다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곳 역시 한반도 지형과 마찬가지로 보지 못하면 후회할만한 절경이자 영월 여행의 백미다. 바위 하나 보자고 거기까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가보면 정말 잘 왔다 싶을 만한 곳이다.서강 줄기를 따라 나선 김에 영월의 서북쪽 끝 사자산 기슭으로 간다. 그곳에는 영월 최대의 사찰인 법흥사(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가 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 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로 창건한 사찰이다. 또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철감 선사 도윤의 제자 징효 절중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나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이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역사의 부침 속에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던 흥녕사는 폐사지처럼 변했던 1902년 대원각 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그리고 1912년 또 한 번의 큰 화재로 소실되었던 사찰은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하였다. 수많은 변고를 겪은 사찰임을 입증하듯 법흥사는 명성에 비해 도량이 화려하지 않다.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법당들은 조화롭지 않고 왠지 엉성한 느낌도 있다. 끊임없이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면서 빚어진 현상이지 싶다. 법흥사를 찾게 되는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인 적멸보궁은 도량 초입에서 산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산길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약사전과 산신각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적멸보궁은 사자산 정상 가까운 곳에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서 있다. 온갖 번뇌와 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란 뜻처럼 자비롭고 선한 자태다. 사리가 봉안된 사리탑은 적멸보궁 뒤 자장 율사 토굴 옆에 위치해 있다. 천천히 산길을 걸어 적멸보궁까지 다녀오는 길은 한적하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혼란한 세상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그렇게 다시 길을 걸어 내려와 만나는 법흥사는 처음 만날 대면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선다. 담담한 모습의 천년 고찰의 사이로 흘러 다니는 나지막한 풍경소리가 석가모니의 참된 진리를 조용히 일러주는 듯하다.동강▶체험여행의 메카 영월래프팅으로 유명한 동강은 오대산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정선 아우라지를 지나 영월읍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맑고 깨끗한 물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두루 품고 있는 동강은 영월의 대표적 이미지이자 생태계의 보고로 통한다. 그 길이만 해도 약 65km. 굽이굽이 절경인 동강에는 어라연계곡과 황새여울을 비롯, 곳곳에 기암절벽과 비경이 펼쳐지고 주변에는 가수리 느티나무, 고성리 산성 등 빼어난 명승들이 산재한다. 옛날에는 정선 아우라지에서 나무로 뗏목을 엮어 큰물이 질 때 서울 광나루나 마포나루까지 운반했다고 하니 그 물줄기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동강을 흐르는 물줄기는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제공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동강이 래프팅의 메카가 된 이유다. 래프팅이 잠시 멈추는 겨울철에는 동강 주변의 다양한 체험 시설이 활기를 띤다. 동강오토캠핑장과 동강생태공원, 영월곤충박물관, 국제현대미술관 등이 동강 가까이에 있어 사계절 추억과 낭만을 선사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천문대 체험이 인기다. 요즘 여행자들 사이에서 영월에 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망설임 없이 별마로천문대(영월읍 천문대길 397)를 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체험 여행이 된다. 별마로천문대는 영월 시내로부터 약 10km 거리, 봉래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천문대에 오르면 영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굳이 천체 관측이 아니더라도 일출과 일몰, 야경의 명소로 꼽힌다. 별자리 관측에 관심이 많다면, 천체관측실에서 유난히 맑은 겨울 하늘의 아름다운 별자리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혹시 ‘단종의 별’이라고 들어 보았는지? 영월이기 때문에 가능한 단종 별자리 찾기가 이곳에서 가능하다. 사자자리 가운데 가장 밝은 별인 ‘레굴루스’가 바로 단종의 별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단종을 기리기 위해 ‘어린 왕’이란 뜻을 지닌 레굴루스를 영월군에서 ‘단종의 별’로 명명해 그를 추억하고 있다.영월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영화 ‘라디오스타’다. 그 동안 무수한 영화들이 전국 곳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처럼 한 도시의 문화와 정서, 정체성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는 흔치 않다. 지난 2006년 개봉한 이래, 영월이라는 도시를 가장 널리 그리고 친근하게 알린 콘텐츠가 ‘라디오스타’다. 지금도 영월 곳곳에서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박중훈과 안성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영화의 촬영 장소 가운데 하나였던 청록다방은 달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 맛집으로 여행자들 사이에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옛 KBS 영월방송국은 동강 변 낙화암 위쪽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 2015년 라디오스타박물관(영월읍 금강공원길 84-3)으로 개관했다.박물관 외벽에는 아직도 KBS 간판과 로고가 그대로 붙어있어 친근함을 더해준다. 박물관에서는 영화 ‘라디오스타’의 주요 장면을 상영하고, 오래된 라디오와 주크박스, 큐시트 등을 전시해 놓았다. 또 방송국에서 실제 사용했던 대본으로 방문객이 직접 녹음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갈 수도 있다. 방송국으로서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박물관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라디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방송 관련 직업에 대한 실질적 경험과 라디오방송 제작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형 박물관으로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다. 영월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즐겁게 찾는 장소로, 박물관 입구에 있는 옛날 라디오 모양의 카페 ‘온에어’가 여행자들을 먼저 반긴다.영월은 박물관 도시로 불린다. 대표적인 박물관만 해도 무려 22개. 자연과 역사, 예술을 총 망라한 다양한 박물관들은 여행자들에게 잠깐 동안의 여유와 쉼을 마련해주며,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기도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영월 박물관 투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다. 그 많은 박물관 가운데 우선 가봐야 할 곳으로 영월군청 앞에 있는 동강사진박물관(영월읍 영월로 1909-10)을 추천한다. 국내 최초의 공립사진박물관으로 국내외 저명한 사진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고,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카메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 전시도 마련되어 있다. 오는 4월11일까지 열리는 소장품 특별전은 특히 볼만한 전시다.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란 제목이 붙은 이 전시에는 최민식, 홍순태, 이해선 작가 등이 찍은 해방 이후부터 70년대까지의 다양한 기록 사진들과 육명심 작가가 찍은 국내 유명 문인들의 초상, 김한용 작가가 찍은 문희, 윤정희, 남정임, 사미자, 남진 등 국내 연예계 톱스타들의 1960~70년대 모습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8호 (21.03.02) 기사입니다]▶ '경제 1위' 매일경제, 네이버에서 구독하세요▶ 이 제품은 '이렇게 만들죠' 영상으로 만나요▶ 부동산의 모든것 '매부리TV'가 펼칩니다[ⓒ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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